[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8장~ 에필로
8. “기만에 대하여”
데이비드가 자기 자신의 상황에 대한 거짓말을 스스로 믿고 있었다. 그가 주장해온 모든 것들 중에 아주 많은 부분이 오늘날의 표본이 되어 남아있다는 사실과 그의 인생을 봤을 때 성공적인 인생으로 보인다. 이를 보고 자기 기만이 결코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를 비롯해 사회의 도덕적 권위자들, 성서 고대 그리스인 기타 등등은 일치된 의견으로 자기 기만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20세기에 자기 기만에 빠진 사람들이 더 건강한 환자, 인생을 더 쉽게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 좌절을 겪은 뒤에도 재빨리 기만의 기이한 연금술을 펼친다. . 겸손을 유지하라는 수천 년 이어져온 경고는 잊었다. 신이 없는 세계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오만을 계속해서 복용하는 것이야말로 실패할 운명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처럼 보인다
장밋빛 렌즈를 끼고 살아가는 일이 불리하게 적용한다는 연구 내용도 있다.
델포이 폴 허스 - 대학생들이 처음에는 자존감이 높은 학생들에게 끌리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들에게 싫증을 내고 그들을 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을 발견.
마이클 더프너 -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는 사람들의 자기과시가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 공동체 안에서 좋은 평판을 받을 때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놓치기도 한다는 걸 발견.
사회적 측면에서만 손해를 보는 게 아니다. 자기만의 두꺼운 거품 벽 안에 있으면 고통이 서서히 축적될 수 있다.
단기적으로 혜택을 얻는 대신 장기적으로 비용을 치르는 것이라고, 장밋빛 렌즈의 힘에는 한계가 수반된다고 말한다.
9. “세상에서 가장 쓴 “
1905년 샌프란시스코 지진이 일어나기 1년 전. 제인 스탠퍼드의 스파이는 데이비드를 비난하는 보고서를 썼다. 공교로운 타이밍에 제인은 사망한다.
제인의 저택에서 마셨던 물을 맛본 조수들은 "기이하고" "쓴" 맛이 난다고 했다.
하지만 독살에 대한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하고, 심신의 안정을 위하여 두 조수와 함께 하와이로 떠났다. 그리고 날이 좋은 어느 날 피크닉을 갔다가 호텔로 돌아와 수프를 먹고 소화제를 먹었는데 그대로 사망했다.
현장에 도착한 세 의사는 소화제의 맛을 봤는데 그와 무관한 "쓴"맛을 감지했다고 한다.
독물학자는 소화제병과 제인의 내장에 있는 내용물을 검사했을 때 양쪽 모두에서 스트리크닌의 흔적을 발견했다.
뉴스에서 이 소식을 듣자 마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하와이로 향했고 시체를 집으로 인도해왔다. 그리고 별도 비용으로 새로운 신입 의사를 고용하고 사인을 독살에서 다른 요인으로 바꿨다. 그리고 그에 맞춰서 제인의 수행원이자 비서인 버사는 말을 바꾸게 된다.
이후 뉴욕타임스에서는 제인의 죽음이 과로에 관련된 것으로 발표된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여론들은 여전히 많고, 작가는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세력부터 데이비드의 반격, 스팬퍼드의 기록물을 비롯한 여러 교수들의 의견 그리고 스탠퍼드의 저명한 교수였던 로버트의 어느 한 책까지 사인에 대한 원인을 찾아 나섰다.
로버트의 책은 사람들의 동기나 감정상태에 관한 극적인 추측은 한마디도 없이 버릴 단어가 전혀없는 얇은 책이었다.
이 책은 독살당한게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고, 로버트의 아내 매기를 찾아 갔을 때 로버트는 독살이 조던의 짓이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작가는 조던에 관한 괴상한 애착과, 그가 작가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주인공이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인생을 되돌려 놓을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관해 골똘히 생각했다.
조던이 그 정도로 확신을 품으면 한 여자의 목숨까지 끊어버릴 수 있게, 그 죽음의 진실을 기꺼이 은폐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마침내 스탠퍼드의 기록물 보관소에 있던 조던의 수집 안내서 중 하나의 430페이지에서 그것을 찾았다. 데이비드는 거기까지 자신을 따라온 대담한 독자들에게 한 가지 비밀을 누설했다.
좀처럼 잡히지 않는 가장 성가신 물고기를 잡을 때 즐겨 쓰는 방법. 바로 독. 언젠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쓴 것"이라고 표시했던 스트리크닌.
10. “진정한 공포의 공간”
시기는 데이비드의 권력이 무너지면서 결국 제인의 정보원을 성급히 해고한 건을 이유로 사퇴를 요구했을 때이다. 모든 행정적 권력을 빼앗기고 명예총장이라는 의례적 직책을 유지하고 있던 데이비드는 새로운 취미를 찾아냈다.
그는 물고기를 수집하러 여행을 다니는 동안 이탈리아 알프스의 아오스타라는 마을에 몇 차례 다녀온 적이 있다. 그 곳은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안식처같은 도시였다. 가톨릭 교회는 수세기에 걸쳐 가족들에게 거부당한 이들을 불러들여 주거와 음식을 제공하고 돌보아왔다.
이곳은 사회에서 무능력자 취급을 받던 그들은 지원을 받아 번성하고 존엄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도와준 근본적인 인간의 방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이곳을 "거위보다 지능이 낮고 돼지보다 품위가 떨어지는","피조물들"이 들끓는 "진정한 공포의 공간"으로 묘사했다.
또 그들을 멍게나 따개비 같은 한자리에 고착되어 살아가는 생물들이 한때는 물고기나 게처럼 더 높은 차원의 형태를 갖고 있었으나 기생으로 자원을 획득해온 결과 더 게으르고 더 약하고 더 단순하며 더 지능이 떨어지는 생명체로 "퇴화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인류의 "쇠퇴"를 예방할 유일한 방법은 이 "백치들"을 몰살하는 것이라고 권고하는 책을 썼다. 그 이후 열성과 과학적 권위를 갖고 옹호한 결과 우생학(EUGENICS)라는 단어가 미국 땅에 널리 보급되었다.
프랜시스 골턴이라는 영국의 과학자가 만든 단어 우생학. "좋은"과 "출생"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조합해서 만든 단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살시키는 기술.
<<네이처>>, <<맥밀란>> 같은 저명한 잡지들을 통해서 이 아이디어를 꺼내놓았다. ''
데이비드는 지구상에서 제거해버리고 싶은 종류의 사람들을 부적합자라는 범주에 몰아넣었다.
교회와 빈민구호소에 꼭 들러서 그들의 노력이 "부적합자 생존"이라는 위험을 유발하고 있다고 경고. 경종을 울리기 위해 아오스타 마을의 이야기를 들려줌. 그곳을 천치같은 피조물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침을 흘리고, 구걸하고 꼴사나운 행동을 하고, 개처럼 내 손을 핥기까지 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꺼낸 좋은 아이디어는 부적합해 보이는 사람들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것으로 "박멸"을 실현할 방법을 자신의 학생들에게 제안했다.
11. “사다리”
데이비드는 죽는 날까지 열광적인 우생학자로 남아 마지막 순간의 깨달음이나 회한을 보여주는 증거는 전혀 없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다.
어떻게 "숨어 있는 보잘 것 없는 것 "것들에 몰두하고 관심을 기울이던 그 상냥했던 소년이, 어떻게 바로 그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존재들을 기꺼이 말살하려는 남자가 된 것일까?
"긍정적 착각은 견제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한 심리학자들의 말이 옳았다.
데이비드는 평생 인생을 향해 하면서 직업과 상, 아내, 자녀, 학장직 그리고 폭발적인 목적의식으로 공허함을 채웠다.
그는 인류가 쇠퇴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생각했을 때,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류를 구출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다. 그는 자연의 질서에 관한 믿음을 칼날처럼 휘두르며, 인류를 구원할 가장 건전한, 아니 유일한 방법은 불임화라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처음 다윈을 읽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우생학을 밀어붙일 때까지, 어느시점에서든 그 믿음을 놓아버리는 것은 다시 현기증을 불러들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방금 자신의 형을 앗아간 세상 앞에서 상실감에 가득 차 떨고 있던 어린 소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세상 앞에서, 그 세상을 전혀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겁에 질린 무력한 아이로. 그 계층구조를 놓아버리는 것은 삶의 회오리바람을 풀어놓는 일. 딱정벌레와 매와 박테리아와 상어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공중으로 날아올라 그의 주변, 그의 위에서 빙빙 돌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독히도 방향 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사다리가 데이비드에게 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해독제. 하나의 거점. 중요성이라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느낌. 바로 그때문에 그를 경멸했음에도 어느 차원에서는 나 역시 그가 갈망한 것과 똑같은 것을 갈망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그가 자연의 질서라는 비전을 그토록 단단하게 붙잡고 늘어졌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데이비드 자서전을 덮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 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자, 이렇게 희망을 놓아버린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할까?
12. “민들레”
나는 버지니아주 간질환자 및 정신박약자 수용소로 차를 몰고 가는중이다. 여전히 주립보호소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나마 몇 년 뒤에는 페쇄하기로 예정되어있었다.
규모가 큰 수용소는 검은 공팡이가 피어있다. 강제로 수용소의 수익을 내기 위한 외양간과 밭도 남아있다. 묘지도 있다. 이 황량하고 외딴 언덕이 우생학적 몰살의 진원이라 생각하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스크림 가게 데어리 퀸에서 애나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거울을 볼 때 복부를 세로로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를 보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하지만 매일 그 흉터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열아홉 살 때 그 수용소에서 자신의 의지에 반해 불임화를 당했다.
강제수용당시 애나와 남자 형제들이 그들의 집 뒤에 있는 우리 안에서 발가벗고 방치된 채 놀고 있는 것을 이웃 사람들에게 목격당했고. 이웃들의 우려, 부모의 가난, 애나의 낮은 지능검사 점수만으로 이 일곱 살 소녀를 "부적합자"로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끌려갔다.
수용소를 떠나고 싶으면 불임화에 동의만 하면 되는데, 어린 애나는 거부했다. 탈출을 시도했지만 경찰에 붙잡혀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열아홉살이 된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때 간호사가 애나에게 검진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검사실로 데려가 얼굴에 마스크를 씌운 뒤 방을 나갔다. 그렇게 불임화를 당하고 그곳을 떠날 수 있을 거라는 말만 전달받았다.
지금 애나는 십여 년 전부터 어려서부터 친한 친구였던 메리와 함께 살고 있다. 메리는 수용소에서 나온 뒤 애나의 동생 로이와 결혼 후 이혼했지만 시누이와 올케로 가족이 된 느낌이 너무 좋아서 여전히 자매처럼 지낸다.
우생학은 그녀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그녀가 누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을 인생에서 펼쳐나가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우생학을 곱씹어보니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나 주먹이 올라가는 게 느껴지자 마자 내 뇌가 주먹을 다시 잡아당겼다. 우리는 이 진실을 무시하고 데이비드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 때문에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력을 저질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은 가능성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애나와 메리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고, 자신들이 받은 빛을 더욱 환하게 반사할 수 있는 이 실질적인 방식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작가는 민들레 법칙을 깨닫는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재, 화가의 염료, 화관, 아이들의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 나비에게는 생명의 유지수단, 벌의 짝짓기를 위한 곳 그리고 개미들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 인간들을 별이나 무한의 관점, 우생학 비전의 관점에서 보았을때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애나,메리)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나는 계속 차를 몰면서 모든 민들레들이 노란 꽃송이를 흔들며 나를 응원해주는 모습을 떠올렸다. 이제야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할 반박의 말을 찾아냈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에 대한 주장은 너무 암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무엇을 향해 가는지 저기 저 돌아서는 모퉁에서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 라고 확신했다. 약속은 없다. 피난처도 없다. 희미한 빛도 없다. 그것은 아직 데이비드의 이야기가 맞이한 진짜 결말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13. “데우스 엑스 마키나”
데이비드의 사망 일주기가 지나고 얼마 후 그의 아내 제시는 작은 정원파티를 열었다. 누가 신경이라도 쓸지, 우생학자에 벌써 등을 돌렸을까 싶었지만 수백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그는 세계1차 대전으로 치닫고 있던 그의 말년에 세계를 돌며 외교관들에게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최고의 인재들을 파괴하는 일에 내보내면, 약한 자들, 낭비하는 자들이 번식하고 나라를 다 차지해 버릴 것이라고 했다. 즉 우생학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미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데이비드의 이름이 붙은 것들과 꽤 많이 마주치게 된다. 고등학교 두 군데, 정부의 선박 한 척, 한 도시의 대로 등등.
데이비는 살아생전 제자들과 함께 인류에 알려진 물고기중에 약 20%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민자들과 빈민들이 발견한 것이라는 사실을 과학적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그는 이민자들의 노동력에 의존, 중국인과 중국계 미국인들에게 좋은 물고기 강탈, 포름알데히드와 에탄올의 알레르기 때문에 주변을 이용한 대리 측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자기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고,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런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에게 가장 소중한 그것을 훔쳐갈 마지막 하나의 방법. 자연의 방법이 다른 무엇보다 훨씬 잔인한 것이었다. 자연은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데이비드가 분류학의 기술을 실행하고, 다윈의 충고대로 진화상의 천연성에 따라 생물을 분류함으로써 작동시킨 그 과정이 1980년대에 분류학자들이 타당한 생물 범주로서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조류는 존재한다.
포유류도 존재한다.
양서류도 존재한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기학(cladistics)는 가지를 뜻하는 그리스어 클라도스(Klados)에서 왔으며, 바로 가지들을 추적하는 것을 뜻한다. “누가 누구와 가장 가까운 관계인가”라는 가장 단순하게 들리면서도 가장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과 관련된다.
이들은 어류와 다른 포유류를 비교하며 한순간이라도 비늘이라는 외피에 시선을 다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더 많은 걸 밝혀주는 다른 유사점을 알아차리기 시작할 거라고 한다. 그 예로 폐어와 소는 둘 다 호흡을 하게 해주는 폐와 유사한 기관이 있다.
물고기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을 과학적으로 타당한 한 집단에 몰아넣겠다는 고집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그리고 그 범주를 “어류”라고 부른다면 그들과 공통 조상을 지닌 모든 후손이 함께 포함될 수 있도록 몇몇 다른 생물들도 어류라는 집단에 넣어야 한다.
개구리도 어류, 새들도 어류, 소들도 어류, 당신의 엄마도 어류.
과학적으로 좀 더 논리적인 일은 어류란 내내 우리의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에필로그”
저자는 물고기를 포기하면 얻게 되는게 무엇인지 몰랐다.
어느덧 시카고를 떠나야 할 때인 것을 알고, 인생을 계속 살아가기 위하여 워싱턴 D.C의 임시직을 구하고 떠났다.
그 곳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인 척 살아가며, 사람들의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서 평소에 보던 자연들 (한번도 의문을 가져보지 않았던 것들) 로부터 새로운 비전을 보게 된다.
직관적인 계층의 구조(새, 나무, 잠자리 등)을 보며 빅토리아풍의 커튼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보기위한 자의적은 것들. 그리고 이런 자의적인 것들에 벗어나 새로운 것을 보려고 한다. 그 커튼을 넘어, 자연위에 우리가 그려 놓은 선 넘어를 보고 싶어한다.
그러고 몇 달 뒤, 어느 바에서 젊은 여성을 만났다. 원래 그런 것을 좋아했듯이 그녀와의 시간을 재밌게 즐겼다. 그녀가 “당신의 섹슈얼리티를 존중해”라는 말은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10월까지는 별 생각없이 지내보기로 한다. 그러면서 10월도 지났고, 그녀의 스케줄에 맞춰서 함께 여행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즐긴 스노클을 통해서 그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사실 그것은 그녀가 그려왔던 인생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인생인 것을 깨닫는다.
이제는, 침대 위 에메랄드색 눈의 아내 곁에 누워 있을 때 총이 떠오르면 그것이 주는 것들을 헤아려본다. 해방, 스트레스와 내가 망쳐버린 것들에 대한 해결책, 수치의 종말.
그러다 물고기에 관해 생각한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매 순간, 인정하는 것.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이다.
작가가 경험했던 모든 것들은 실제로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것들이었다. 과학자들은 “긍정적 상상을 갖는 것이 목표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작가는 서서히, 목표만 보고 달려가는 터널 시야 바깥에 훨씬 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믿게 됐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잘못 알고 있을까? 과학자의 딸인 나로서는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 내가 물고기를 포기할 때 나는 과학자체에도 오류가 있음을 깨닫는다.
과학은 늘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도중에 파괴도 많이 일으킨다. 자연에 질서정연한 계급구조가 존재한다는 추정 – 인간이 지어낸 것, 겹쳐 놓기, 추측 -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특히 도덕적, 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자ruler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